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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화제의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 양규 장군의 죽음이 방영되면서 그동안 많이 알려지지 못했던 양규 장군의 활약들이 집중 조명 받고 있습니다.
 
제2차 여요전쟁에서 양규 장군의 활약은 임진왜란의 이순신 장군의 활약과 비교될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그 양규 장군의 전설이 시작됐던 제2차 여요전쟁의 흥화진 전투에 대해서 한 번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거란의 2차 침략이라고도 표현하는 제2차 여요전쟁은 그동안 거란을 지휘했던 소태후가 죽고 야율융서라고도 불리던 성종이 자신들이 인정한 고려의 왕인 목종을 죽이고 정변을 일으킨 고려의 강조를 벌하겠다는 명목상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사실 송나라와 경쟁관계에 있는 거란의 입장에서 강동 6주를 떼어주었는데도 여전히 친송정책을 펼치던 고려를 정복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거란 침략 시 벌어진 첫 전투가 바로 흥화진 전투인데 당시 흥화진에는 양규 장군이 있었습니다. 본래 흥화진을 지키는 흥화진사였던 양규는 전투가 벌어진 당시에는 서북면 도순검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실 이 직책은 기존에 강조가 가지고 있던 직책이었습니다.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면서 현종을 왕으로 세운 강조는 개경에서 더 높은 관직을 수행하게 됐고 양규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사실 양규는 강조의 정변을 지지하는 세력이 아니었지만 거란 침략 시 강동 6주가 포함된 서북면을 가장 잘 지켜낼 수 있는 장수라고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에 서북면 도순검사의 자리를 맡게 되었습니다.
 
본래 서북면 도순검사는 서경으로 이동해 업무를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양규는 거란의 침입 시 강동 6주 중에서도 거란 땅과 가장 가까운 성이 흥화진이었기 때문에 그 곳에 머물면서 거란의 침략에 대비를 했다고 합니다.
 
흥화진은 진이라고 불릴 정도로 산성 수준의 작은 성이었고 전략적인 방어기지였습니다. 그 곳에는 다른 성들과는 다르게 주민들이 생활하는 공간은 없었고 군사들만 거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곳에서 흥화진사 정성의 3천여 병력과 양규가 데려온 3천여 병력이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훈련을 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010년 11월 16일 거란의 성종은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 앞으로 쳐들어왔고 대군으로 흥화진을 포위한 뒤 항복을 권유했습니다. 겨우 6천 정도의 병력으로 40만을 상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양규 장군은 뼈가 재가 되고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고 그렇게 전투가 시작됐습니다.
 
흥화진은 작은 산성이었지만 천해의 요새였습니다. 산 위에 있는 성이면서 주위에 강도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한 번에 많은 병력이 공격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거란군의 수많은 보병들이 성으로 돌진하자 고려군은 먼저 팔우노라는 강력한 무기를 발사해 거란군의 사기를 꺾었습니다. 
 
팔우노는 갑옷이나 방패를 관통해 적들을 죽일 수 있는 위력적인 활이었습니다. 하지만 거란군은 지휘관들을 앞세워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서양의 석궁과 비슷한 무기인 격노를 사용해 지휘관들을 죽이고 활을 사용해 보병들을 죽이면서 다시 한 번 거란군의 사기를 꺾었습니다.
 
결국 거란의 자랑인 기병들이 달려나왔지만 성 주변에 엄청나게 깔려있던 마름쇠를 밟고 말들이 쓰러지는 바람에 다시 한 번 거란의 공격이 힘을 잃고 맙니다. 이후에도 성 근처까지 다가와 첨두목려라는 원목으로 만든 공성 무기를 이용해 성문을 공격하려했지만 기름과 불화살로 고려군이 공격을 막아내면서 성문 공략에 실패합니다.
 
이렇게 양규 장군의 철저한 대비와 잘 훈련된 정예병이 적의 공격을 막아내자 거란군은 고려의 민간인들을 데려와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죽이기까지 합니다. 고려군의 사기를 떨어트리려고 생각한 방법이었지만 오히려 고려군은 이 야만적인 행동을 보며 전의를 더 불태웠고 오히려 고려군의 사기를 드높이게 됩니다.
 
항복하지 않고 죽기로 싸우는 고려군의 활약 속에 흥화진은 무려 7일 동안이나 수성에 성공하고 요나라 성종은 더이상 흥화진에서 오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 흥화진의 남쪽인 무로대에 20만의 방어 병력을 남겨두고 나머지 20만의 병력으로 남쪽으로 진군을 하게 됩니다.
 
비록 남쪽으로 내려간 성종의 20만 대군이 초반에 강조를 사로잡고 고려군에 대패를 안기면서 침략이 성공으로 이어지는 듯 했지만 이 때 점령하지 못한 흥화진 때문에 추후에 후미를 공격 당하면서 2차 침략이 실패로 끝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황제가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야심차게 출정했지만 첫 단추부터 꼬이게 만들었던 양규의 흥화진 전투는 역대 대첩과 비교해도 될 정도로 엄청난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겨우 6천여명의 병력으로 7일간 장수들과 군사를 독려해가면서 잠도 못자면서 열심히 싸웠을 양규 장군의 흥화진 전투. 귀주 대첩만큼이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전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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