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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 해전은 7년동안 이어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끝낸 이순신 장군의 최대 규모의 해전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이 전투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최후의 해전이기도 합니다. 노량 해전의 규모는 임진왜란 뿐만 아니라 전세계 해전을 통틀어서도 1차 세계대전 이전 최대 규모의 해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큰 규모의 전쟁이었습니다.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 뿐만이 아니라 명나라 수군까지 참전했는데 조선 수군은 판옥선 60여척과 협선, 방패선 180여척에 병사는 6~7천여명이 참전했고 명나라 수군은 사선, 호선 300여척에 판옥선 2척, 병사는 1만5천~8천명. 일본 수군은 안택선과 세키부네를 합쳐 최소 350여척에서 500여척에 병사들은 2만2천~3천명이 참전했다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조명 연합수군 함선 500여척과 일본 수군 500여척이 충돌한 최대 규모의 최후 해전이었던만큼 상당히 치열했으며 양 측의 사상자도 어마어마했고 이 전쟁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이후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싸웠던 일본 세키가하라 전투 결과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사실 노량 해전은 상황에 따라서는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해전입니다. 1598년 9월 18일(음력 8월 18일),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조선에 있는 다이묘들에게 공식적으로 철군 명령이 떨어졌고 최대한 피해없이 물러나려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퇴로를 막지만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군의 입장에서 7년동안 조선 곳곳을 쳐들어와 황폐하게 만들고 백성들을 잔악무도하게 유린했던 일본군들을 순순히 돌려보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을 온전하게 돌려보낸다면 추후 재침략의 불씨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퇴로를 막아 몰살시키는 것이 첫 목표였습니다.
이를 위해 조명연합군이 육지에서 먼저 공세를 가했지만 사천왜성이나 울산왜성 같은 일본의 왜성들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고 부산 앞바다까지는 제해권을 가지고 오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후퇴하는 일본군을 막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비교적 서쪽에 있는 순천왜성에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는 상황이 좀 달랐습니다.
다른 왜성의 일본군들은 바다를 통해 본국으로 도망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순천왜성에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조명 연합군이 비록 일본의 왜성들을 공략하지는 못하고 있었으나 성 주변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로로 퇴각할 수도 없었고 바다에는 이순신 장군이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니시는 병사들이 먹을 수 있는 식량도 거의 다 떨어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 진린 제독과 이순신 장군에게 연락선만이라도 보낼 수 있게 길을 열어달라고 뇌물을 보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당연히 거절했지만 진린 제독이 뇌물을 받고 길을 열어줬고 결국 1598년 12월 11일 고니시의 연락선 1척이 포위망을 통과했습니다.
일본군 4명이 탄 연락선이 진린 측 포위망을 통과한 사실을 눈치챈 이순신 장군이 격노해 추격을 명했고 추격군은 한산도까지 추격했지만 일본군이 먼저 육지로 도망쳐버리면서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들에게 연락을 받은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는 고성의 타치바나 무네시게, 남해의 소 요시토시, 부산의 테라자와 히로타카 등과 함께 고니시를 구원하기 위해 서쪽으로 출정합니다.
이미 포위망을 뚫고 나간 연락선을 잡지 못한 뒤 이순신은 세작들을 통해 일본군의 동태를 살폈고 남해 창선도로 집결해 고니시를 구원하러 오는 시마즈의 수군이 순천왜성에 도착하기 전 노량 해협으로 가서 격퇴할 작전을 세우게 됩니다. 1598년 12월 15일 진린 제독을 찾아간 이순신은 16일쯤 노량 해협에 도착할 일본 수군들을 먼저 나아가 격퇴하자고 제안했지만 명군의 입장에서는 이미 끝난 전쟁에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명군 없이도 출전을 강행했기 때문에 이미 한 번 목숨을 빚진 적이 있고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있던 이순신 장군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출전하게 됩니다. 노량으로 출전하면서도 고니시에게 포위망이 풀렸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오히려 위장공격을 하면서 최대한 신속하게 많은 함대들을 이동시켰습니다.
고니시의 구원 신호를 보면서 진격하던 시마즈는 신속하게 노량 해협을 지나가려고 했지만 이미 이순신의 판옥선이 앞에 있었고 일본 함대가 노량 해협을 통과할 때쯤 기습 포격을 맞게 되자 당황했습니다. 1598년 12월 16일 오전 0~2시 사이였기 때문에 시야 확보도 안됐던 일본군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나 시마즈는 만만한 장수는 아니었습니다.
복병 함대가 많지 않다고 느낀 시마즈는 일본 수군의 자랑인 속도로 조선 함대에 달라붙어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보고 근처에 있는 명나라 함대가 참전을 했지만 규모에 비해 전투력이 떨어지는 명군의 함대를 본 시마즈는 전속력으로 전진해 명나라 수군을 돌파하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당시 바람은 동쪽으로 불고 있었고 화공을 전개한 조선 수군 때문에 다시 한번 일본 수군은 당황하게 됩니다. 결국 남쪽 바다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시마즈는 전속력으로 조명연합군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동하지만 그들의 앞에 보이는 건 육지였습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밤이었고 익숙한 해협이 아니었기 때문에 남쪽인 줄 알고 갔던 곳은 관음포였고 독 안에 든 쥐가 되어버린 일본군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명군 쪽으로 돌격을 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이순신의 본대가 일본 수군의 옆 면으로 돌진하면서 또다시 일본군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본래 이순신 장군은 근접전 없이 화포로 일본군을 제압하면서 아군의 피해를 최소로 하는 전술만 사용했지만 노량 해전에서만은 예외였습니다. 일본군을 단 한 명도 살려보내지 않겠다는 각오로 최후의 일전을 치뤘기 때문에 근접전도 강행했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하는 일본군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아군의 피해도 발생했습니다.
명군의 피해도 상당했습니다. 그 당시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 크기나 내구성이 명군과 일본군의 함대에 비해 우월했고 포를 쏘기도 용이했습니다. 반면 명군의 함선은 크기도 비교적 작고 일본의 함선을 상대하기에는 내구성이 좋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이순신 장군이 명군에게 2척의 판옥선을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 2척의 판옥선은 대장선으로 쓰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명군이 판옥선을 다루는데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전투 중 한 척에서 사고로 불이 나면서 명나라 부도독이었던 등자룡이 탄 판옥선이 일본군에 둘러쌓여 사망하게 됐고 진린 제독도 일본군의 공격에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를 본 이순신 장군이 진린 제독을 구원하러 갔고 그 과정에서 점점 더 일본 함대와 거리가 가까워졌습니다. 야간이었기 때문에 전함식별이나 조준도 힘들었고 근접전과 백병전도 많이 발생했습니다. 근접전과 백병전은 당시 일본 수군이 좀 더 우월했었기 때문에 아무리 혼란에 빠진 일본군이라고 한 번에 제압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0~2시부터 시작된 전투는 해가 뜰 때까지 치열하게 진행됐고 관음포에 갇혀버린 일본 수군을 끝까지 섬멸하기 위해 대장선을 이끌고 직접 북을 치며 돌파를 하던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의 조총에 맞아 쓰러지고 맙니다. 난전 속에 쓰러진 이순신 장군은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둡니다.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우려해 유언을 남긴 이순신 장군의 뜻을 지키기 위해 곁에 있던 아들과 조카가 북을 번갈아치면서 병사들을 독려했고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알지 못한 다른 함선들은 무사히 해전을 승리로 마무리지었습니다. 시마즈는 대패 뒤 작은 배에 옮겨타 겨우 도망쳤고 이 모습을 본 고니시도 몰래 도망치면서 노량 해전이 끝나게 됩니다.
500여척에 이르던 배는 겨우 50여척만 살아서 돌아갔고 200여척의 배를 침몰시키고 100여척의 배를 나포했으며 일본군의 1만 2천명을 사살한 대승이었습니다. 비록 조선 수군과 명군도 300여명씩 전사했지만 일본군에 비하면 적은 수였고 함선은 겨우 몇 척만 침몰했습니다.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옵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라는 말을 남기고 출정했던 이순신 장군은 적을 섬멸했지만 죽음을 피하지 못했고 이순신 장군의 죽음 소식을 들은 조선 수군 뿐만 아니라 진린 제독, 명 수군들까지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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