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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들의 호칭을 들어보면 누구나 한 번쯤 의문을 가질 법한 호칭에 대해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왕들의 이름을 보다보면 어떤 임금은 '조'자로 끝나고 어떤 임금은 '종'자로 끝나기도 하고 또 어떤 임금은 아예 '군'으로 끝나기도 합니다. 또 사극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보면 세종대왕을 '이도', 정조를 '이산'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일단 조선시대 왕의 호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실제 왕의 이름에 해당하는 '휘', 또 하나는 왕의 죽은 후 부르는 이름 '묘호'입니다.

 

일단 '휘'는 실제 왕이 재위기간동안 사용하는 왕의 이름인데 가만히 보면 이름이 외자입니다. 세종은 이도, 연산군은 이융, 영조는 이금, 정조는 이산... 이렇게 외자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조선시대 임금들은 이렇게 외자를 사용했을까요?

 

바로 왕의 이름은 거룩하고 존엄했기 때문에 모든 백성들이 글자로써서도 입으로 발음해도 안됐기 때문입니다. 이를 피휘라고 했는데 두자를 쓸 경우 백성들이 글자로 쓰거나 입으로 발음하지 않아야 하는 글자가 배로 늘어나기 때문에 최대한 백성들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한 글자로만 정했다고 합니다.

 

이 피휘와 관련된 일화들이 실제로 몇 가지가 있는데 연산군 때는 유생들이 임금의 이름을 발음했다는 이유로 귀양을 가기도 했고 영조 시대 때는 승지가 상소문을 읽던 중 영조의 이름인 '금'자가 있어 읽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자 이를 본 영조가 직접 허락을 해 발음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묘호' 는 왕의 삼년상이 끝나고 신주가 종묘에 들어가면 종묘에서 그 신주를 부르는 호칭입니다. 조선시대를 예로 들면 태조, 태종, 세종, 영조, 정조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좌측이 고려 태조 왕건, 우측이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

이 묘호도 법칙이 있는데 나라를 세운 왕은 '태조'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뛰어난 업적을 세운 왕은 '태종', 제도와 문물을 완성시킨 왕은 '성종' 이라고 합니다. 고려시대 때는 태조 왕건, 조선시대 때는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둘 다 태조라고 불리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시대, 조선시대 모두 태종과 성종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나라를 세운 태조를 제외하고 묘호에 붙는 '조'와 '종'의 차이는 본래 선왕의 적자로서 부자간의 왕위를 계승한 임금은 '종', 왕위계승권 밖에 있는 자가 들어와 임금이 되면 '조'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한 예로 조선 전기에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뺐은 세종의 둘째아들을 우리는 '세조'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가 적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규칙이 임진왜란 이후로 다른 의미로 바뀌게 됩니다. 바로 광해군이 제위 시절 자신의 아버지가 임진왜란을 막아낸 왕이라며 업적을 높이기 위해 본래 '선종'이었던 묘호를 '선조'로 바꿨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도망다니기 바빴던 왕이지만 광해군은 마치 자기 아버지가 나라를 세운 '태조' 이성계와 같이 훌륭한 공적을 세운 것처럼 꾸미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 이후에 조가 종보다 좋은 의미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업적이 많은 왕은 '조'를 붙이고 그렇지 않은 왕들은 그냥 덕이 많은 왕이라는 뜻으로 '종'자를 붙이게 됩니다. 영조, 정조도 원래는 영종, 정종이었으나 고종 시절에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조'의 칭호를 붙여줬고 '서학의 유포와 홍경래의 난을 평정했다'는 이유로 순종도 순조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유이하게 '조'도 '종'도 아닌 군으로 끝나는 임금이 있는데요. 바로 연산군과 광해군입니다. 이 두 왕의 공통점은 모두 폐위된 왕이라는 점인데요. 이처럼 폐위된 왕 뒤에는 '군'자가 붙고 조선왕조실록에도 태종실록, 세종실록 처럼 뒤에 실록을 붙이지 않고 연산군 일기, 광해군 일기처럼 일기로 구분지어 기록했습니다.

 

원래 우리나라도 고려시대에는 '황제'와 '황태자' 같은 명칭이 있었지만 고려 말에 몽골의 지배를 받으면서 '황제'는 '왕'으로 격하됐고 이후 조선시대에도 '왕'과 '왕세자'로 명칭이 정해졌습니다.

 

그래서 왕의 아들이면서 임금의 자리를 이을 이로 정한 이를 세자로 불렀는데요. 세자는 바로 왕세자의 줄임말입니다. 원칙적으로 세자는 적장자, 중전의 첫째아들(정실의 아내가 낳은 맏아들)로 정해야 하지만 조선 역사를 보면 그것이 항상 지켜지지는 않았습니다. 

 

또 세자 뿐만이 아니라 왕은 많은 아들과 딸을 자식으로 두고 있었는데 이들 사이에도 구분하는 명칭이 있었습니다. 아들은 '대군'과 '군'으로 나뉘고 딸은 '공주'와 '옹주'로 나뉘었습니다. 대군은 왕비(중전)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 군은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이었고 공주는 왕비(중전)의 몸에서 태어난 딸, 옹주는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딸이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대군'이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만 조선시대 후기에 가면 적자를 찾을 수 없어 후궁의 자식이나 천민의 자식까지도 왕의 자리에 오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첫 후궁의 자식으로 왕의 자리에 오른 임금은 선조였고 최초의 천민의 자식(얼자)으로 왕의 자리에 오른 임금은 영조입니다.

 

조선시대는 일부일처제였지만 처첩제가 있었고 처로는 한명만 들일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첩으로 계속 들일 수 있는 제도였습니다. 따라서 정략결혼을 하더라도 양반은 얼마든지 농민이나 천민인 여인의 경우에도 마음에 들면 얼마든지 첩으로 들일 수 있었는데 이렇게 첩을 들여 자식을 낳으면 그 여인의 신분이 농민일 경우 '서자'라고 했고 그 여인의 신분이 천민일 경우에는 '얼자'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자주 듣던 '서얼'이란 단어가 바로 서자와 얼자의 앞 자를 따와서 첩의 자식이라는 의미로 신분차별할 때 썼던 표현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제도가 많은 이유로 변화하게 되지만 그 이전까지만 해도 '서얼' 출신은 문과 시험은 볼 수 없고 무과 시험이나 잡과 시험만 볼 수 있는 차별이 존재해 많은 서얼출신이 무시받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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