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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3일 전쟁이 발발해 부산성 정발, 다대포성 윤흥신, 동래성 송상현, 낙동강 방어선 박진, 상주전투 이일, 탄금대 전투 신립 장군까지 연달아 패배하면서 왜군의 북상을 막지 못했습니다.

김명원이 한강 방어에 실패하면서 개전된 지 20일만에 한양까지 점령 당했고 김명원, 한응인이 임진강 방어에 실패하고 평양성에서 윤두수, 이원익까지 패퇴하게 되면서 선조는 의주까지 피난을 가게 됐고 고니시가 평양까지 점령하게 됩니다.

이렇게 육지에서 암울한 패전 소식만 들려오는 상황 속에 해상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1,2차 출정으로 왜군들을 연이어 격퇴하고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2차 출정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던 6월5일과 7일 사이에 육지에서는 임진왜란사의 가장 치욕스런 전투인 용인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당시 조선은 각 도마다 관찰사를 두고 있었습니다. 관찰사는 종 2품에 해당하는 높은 직급으로 각 도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전부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군이 경상도를 침략해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한양으로 진격하던 상황에 바로 옆에 있던 전라도 관찰사 이광도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광은 전라도 근왕군 5만 병력을 모아 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령관 역할을 해야했던 이광이 얼마나 무능했는지 전쟁이 무서워 바로 한양을 지원하러 가지 않고 갖은 핑계를 대며 근왕군의 북상 속도를 늦췄습니다. 결국 병력이 공주 근처에 도착했을 때 한양이 점령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이광은 다시 군대를 뒤로 돌리더니 힘들게 모인 5만의 근왕군을 해산시켜 버립니다. 당연히 휘하의 장수들이 반발했으나 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전부 해산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뒤늦게 듣게된 선조는 노발대발하면서 이광에게 다시 군대를 모아 한양을 수복할 것을 명령내립니다.

결국 다시 5만명의 근왕군이 모이게 됐고 북상 중에 경상도 관찰사 김수가 패잔병 100명,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이 8천명을 데리고 합류하면서 대략 6만의 병력이 모이게 됩니다. 실록에는 10만이라고 나오기도 하지만 실제는 6만 정도로 예상됩니다. 적은 병력이 아니었지만 사실 이 6만 병력은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오합지졸이었습니다.

북상을 하는데 군율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는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당연히 실전 경험도 없는 군인들이었지만 북상 중인 병력 숫자를 듣고 한양을 지키고 있는 왜군도 놀라게 됩니다.

당시 수원 독산성에 왜군 몇백명 병력이 있었는데 이 삼도 근왕군의 북상 소식을 듣고 독산성을 포기하고 도망치면서 근왕군은 전투한번 벌이지 않고 수원에 무혈입성 하게 됩니다.

당연히 군사들의 사기도 올라갔고 병사를 이끌던 장수 중 한 명인 권율 장군이 기세를 몰아 한강 이남 쪽으로 진격하자고 이광에게 얘기했지만 근처 용인에 왜군 600여명이 후퇴하지 않고 그냥 주둔해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공격하자는 의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관찰사 이광의 조방장 백광언 등이 1만 병력을 주면 그들을 치고 오겠다고 호기롭게 말하고 출정했으나 오히려 왜군의 반격에 목숨을 잃게 되면서 사기가 떨어지고 맙니다. 이 600여명의 병력은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병력이었습니다.

원래 와키자카는 수군이었고 경상도 수군을 상대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원균이 판옥선을 바다에 수장시키고 도망치자 역할이 사라져 육전에 참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한양 점령 시 와키자카는 일부 병력을 데리고 한양에 가게 됐고 나머지 병력들을 용인에 남겨두었는데 이 병력에 백광언이 목숨을 잃게 된 것입니다.

와키자카는 자신의 병력 600여명이 조선 5만 병력에게 둘러쌓였다는 소식을 듣고 한양에 있던 1000여명의 병력을 데리고 용인으로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와키자카가 합류한 다음날인 6월 6일, 삼도 근왕군을 아침에 습격해버립니다. 정찰조, 매복조가 없었던 것인지 있었는데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이지 알 수 없지만 아무 전투 태세 없이 본진을 습격 당한 근왕군은 아침밥을 먹고 있다가 습격에 놀라 전열을 갖추지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실제 와키자카가 죽인 조선군은 천여명 남짓이었고 포로도 200여명 밖에 되지 않았으나 이 한 번의 습격으로 5만이 넘는 근왕군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한양 수복의 꿈은 날아가버립니다. 와키자카에게 죽임을 당한 조선군 숫자보다 도망가다가 서로 밟혀서 죽은 숫자가 더 많았다고 하니 얼마나 치욕스러운 전투였는지 얼마나 조선군이 오합지졸이었는지 알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물론 나중에 이 병력이 다시 모여 웅치, 이치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고 행주대첩에도 합류해 활약하게 되지만 용인 전투에서 와키자카에게 대패를 당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 조선 근왕군이 엄청난 무기와 군량미를 모두 그대로 놓고 도망쳤기 때문에 피난 가다 굶어죽던 백성들이 군량미를 확보해 살아남았다는 웃지 못할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이 전투 이후 와키자카는 일본에서 떠오르는 샛별이 됐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당시 해전에서 애를 먹고 있던 이순신을 공략하라는 특명을 받게 됩니다. 이 특명을 받고 내려와 벌어지게 되는 해전이 바로 그 유명한 한산도 대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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